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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조선]하종현 전 서울시립미술관장과 박미자씨 “할머니의 가출, 해볼 만하네요”     2011/01/13




“난, 평생 안 팔리는 그림만 그렸어. 덕분에 이렇게 그림이 많이 남아 있으니 행복한 거지. 물방울로 유명한 김창렬 화백이 날 부러워하더라고. 김 화백은 그림이 잘 팔려서 남아있는 작품이 없다면서. 하하하.”
  
   “나도 화가가 그림을 팔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옛날에야 어디 그림이 팔렸나요? 화가는 그림만 그리는 줄 알았지. 화가의 아내로 고생 안했냐고요? 그냥 당연히 해야 하는 줄 알았죠.”
  
   국내 추상미술계를 이끌어온 하종현(75) 홍익대 명예교수와 부인 박미자(67)씨의 말이다. “그림이 안 팔려 더 좋다”는 하 교수나 “고생은 당연히 하는 것 아니냐”는 박씨나 부창부수(夫唱婦隨)다.
  
   하 교수의 이력은 화려하다. 서른두 살에 홍익대 미대 전임강사가 된 이후 2000년 정년퇴임을 하기까지 33년간 홍익대에 재직하면서 한국미술협회 이사장과 미대 학장을 역임했다. 1969년엔 아방가르드 협회(AG)를 창립, 5년간 회장을 맡아 전위예술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30여년 재직한 홍익대를 떠나면서 받은 퇴직금 2억5000만원을 쾌척, 하종현 미술상을 만들었다. 매년 유망 작가 한 명을 선정해 상금 1000만원을 주는 하종현 미술상은 올해로 10회째를 맞았다. 퇴임 이후엔 서울시립미술관 관장(2002~2006)을 지냈다. 하 교수는 2009년 은관 문화훈장을 받았고, 지난 연말에는 미술협회가 주는 올해의 대한민국미술인상을 받았다.
  
   하 교수가 화가로, 교수로, 단체장으로 바깥에서 여러 몫의 삶을 사는 동안 집안의 공백을 메우는 것은 부인의 몫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30여년 모은 적금 같은 퇴직금을 한 푼도 써보지 못했으니 부인의 속은 오죽했을까. 부인의 고생한 이야기 좀 들어볼 생각으로 경기도 일산 서구 가좌동에 있는 아틀리에 겸 자택을 찾았다.
  
   생각과는 달리 하 교수 부부의 인터뷰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40여년 호흡을 맞춰온 부부에게 지나간 삶은 ‘압축파일’과 같았다. 젊은 시절의 가난도, 치열했던 작품 활동도, 간단치 않았을 내조도 한마디 대답으로 끝났다.
  
   하 교수에게 “어떻게 만나 결혼했느냐”고 물으니 “오다가다 만났지 뭐~.” 박씨에게 “퇴직금이 아깝지 않았느냐”고 물으니 “좋은 일에 쓰겠다는데 뭘~.” 요즘말로 ‘쿨~’한 부부다. 나중엔 박씨가 “아휴, 우리가 말을 못해서 어떡해. 기사를 어떻게 쓰나”라고 말하면서 기자 걱정을 하기에 이르렀다. 호탕한 하 교수와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박씨와의 ‘짧고 굵은’ 대화는 네 시간 넘게 이어졌다. 군더더기 없는 삶을 살아온 부부에게 과거는 ‘수필’이 아닌 ‘시’로 요약되는 모양이다. ‘시’를 다시 ‘수필’로 늘리는 것은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첫 전시회
  
    교사를 하다 결혼하자마자 그 좋은 직장도 그만두고 내조만 했던 박씨가 공개적인 ‘가출’을 한 전력이 있단다.
  
   평범한 주부로만 알았던 박씨는 개인전을 치른 화가였다. 화력도 40년이 넘는다. 2년 전 그동안 작업한 그림을 들고 집 밖으로 나섰다. 바로 ‘할머니의 가출’이었다. 세종문화회관 전시실에서 생애 첫 전시회를 열었다. 하 교수가 전시의 제목을 ‘할머니의 외출’이라고 지어줬다. “처음엔 할머니라고 하니까 싫었어요. 근데 가만 생각해보니 할머니더라고. 그래서 이 양반이 지어준 대로 했지 뭐.” 아직은 할머니보다는 ‘아줌마’로 보이는 박씨의 말이다.
  
   박씨는 서라벌 예대 공예과를 졸업했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던 박씨는 두 아이를 키우면서도 틈틈이 그림을 그렸다. 아이들이 자라자 홍익대 사회교육원을 4년 동안 다니며 부족한 그림공부를 채웠다. 박씨의 그림은 긍정적인 그의 성격처럼 밝고 화려하다. “난 꽃이 좋아요. 꽃을 기르는 것도 좋아하고. 처음엔 꽃을 주로 그렸는데 지금은 많이 자유로워졌어요.”
  
   작업할 때 하 교수가 조언을 해주느냐고 물었다. “안해 줘요. 뭐라고 이야기하면 남의 그림이 된다고. 사실 말해도 귓등으로 흘리고 내 멋대로 그려요.”
  
   화사한 꽃그림이며 ‘푸짐한’ 아줌마 얼굴에 점을 찍어놓은 마릴린 먼로 같은 자화상 등 밝고 따뜻한 박씨의 그림은 반응이 좋았다. 개인전을 한 이후 국립의료원 NMC 미술관이 초대전을 제의해왔다. 그 뒤로 일산과 분당 국민은행 PB센터에서도 요청이 와 전시를 했고 한·베트남 수교기념 전시에도 참여했다.
  
   조심스럽게 시작한 ‘할머니의 가출’은 점점 대담해지고 있다. 오는 2월 독일 프랑크푸르트 괴테문화원에서 열리는 ‘한국의 얼과 멋’전(2월 26일~3월 5일) 초대작가 네 명 중 한 명으로 참가한다. 지금까지 길어야 2~3일 집을 비우는 것이 전부였던 박씨가 모처럼 ‘장기 가출’을 결심한 것이다. “이 양반 퇴임 후엔 집을 비운 적이 없는데 이번 기회 아니면 못 갈 것 같아서 용단을 내렸어요. 인생에 몇 번 안 오는 기회 같더라고요.”
  
   “남편보다 더 유명해지는 것 아니냐”고 묻자 박씨는 손사래를 치면서 말한다. “아휴~ 난 그런 생각 없어. 저 양반이 더 유명해져야지. 난 그냥 조용히 사는 사람이에요. 이번 인터뷰도 나한테 물어봤으면 안한다고 했을 거예요.”
  
  
   하 교수의 못질
  
    “하마터면 마누라도 바꿀 뻔했어.”
  
   박씨가 ‘잦은 가출’을 하는 동안 하 교수는 작업장을 지키며 ‘거사’를 도모했다. “과거의 흔적을 남기지 말고 다 바꾸자는 생각으로 지난 1년 동안 지금까지 한 작품을 완전히 뒤집어엎고 새로운 작업을 시작했어. 마누라까지 안 바꾼 게 다행이야.”
  
   농담처럼 말했지만 하 교수에겐 손발을 끊는 아픔과도 같은 것이었다고 한다. 하 교수는 ‘접합’시리즈로 유명하다. 초기 기하학적 추상, 설치, 철조망을 이용한 작업을 거쳐 ‘접합’시리즈에 몰입해 온 것이 벌써 35년이다. 캔버스 뒤에서 물감을 짜 넣어 앞면으로 삐져 나온 물감을 주걱이나 붓으로 밀거나 누른 작품이다. ‘접합’은 캔버스의 뒷면과 앞면을 한데 붙인다는 의미이다. ‘접합’은 캔버스 앞에 그림을 그린다는 고정관념을 뒤집어엎은 ‘일대 사건’이었다. 평론가들은 ‘캔버스 뒷면의 발견은 캔버스를 찢어 공간 개념을 만든 루치오 폰타나(1899~1968)의 실험에 비교될 만한 일’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하 교수의 새로운 도전은 캔버스 뒷면과 앞면의 접합이 아닌 캔버스 조각과 조각의 또 다른 접합이다. 길고 좁은 캔버스 조각을 잇대고 그 틈으로 물감을 짜낸다. 그렇게 수많은 조각들이 덧대져서 수백 호의 대형 작품이 만들어진다. 단색만 고집하던 것도 확 버리고 과감하게 컬러를 입혔다.
  
   ‘컬러’ 시도는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박씨도 늘 말해오던 것이었다. 박씨의 ‘훈수’가 통했던 것일까? 하 교수의 말이다. “지난 10년을 돌아보니 국내외 개인전 5번, 훈장 2번, 시립미술관 관장 4년, 하종현 미술상을 10번이나 시상했더라고. ‘10년이 큰 가치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다시 10년을 매달릴 일을 만들어야겠더라고. 수십 년 손에 익은 작업을 버리고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큰 모험이지만 앞으로 10년을 준비하는 거야. 체력이 있을 때 바꿔야 해.”
  
   작가에게 변화는 숙명이다. 하 교수는 과거와 단절을 하기 위해 스스로 큰 의식을 치렀다. 과거의 작품을 큰 캔버스에 엎어놓은 후 철조망을 두르고 망치질을 했다. “나를 벼랑 끝에 두지 않으면 안돼. 팽팽한 긴장 속에서 예술이 나오거든. 난 늘 그렇게 살아왔어.” 하 교수는 새로운 작품과 함께 당분간 자신의 삶도 일산 작업장 안에 가두기로 했다.
  
    
   “나는 행복한 작가”
  

▲ 2008년 박미자씨의 작품 ‘꽃향기’ “집 동쪽을 아파트 단지가 꽉 막고 있잖아? 그것이 다 자연의 섭리야. 관장이고 뭐고 세상일은 쳐다보지 말고 작업하라는 뜻인 거지.”
  
   아파트 단지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자택은 생각보다 규모가 컸다. 2층 살림집 옆으로 서재로 쓰는 한 동의 건물이 있고 안쪽으로 3동의 큰 건물이 자리를 잡고 있다. 그중의 한 동은 작업실과 작품 보관소로, 두 동은 전시실로 꾸며져 있다. 두 동의 전시실은 웬만한 미술관 못지않다. 하 교수의 초기작부터 최근까지의 흐름을 한눈에 알 수 있도록 전시가 돼 있다. 2층으로 만들어진 작품보관소에는 작품 수백 점이 빼곡히 보관돼 있었다. 전업작가 못지않은 작업량이 놀라웠다. 하 교수는 “아마 1000점은 될 거야. 아침마다 이곳을 돌면 얼마나 흐뭇한지 몰라. 난 정말 행복한 작가”라고 말했다. 하 교수의 작품은 수백 호가 넘는 대형작품이 많다. 물감을 짜내서 작업을 하니 물감도 많이 들고 무게도 만만치 않다. “물감을 가장 많이 쓰는 화가일 거야. 작품도 무거워. 나중에 안 팔리면 무게로 달아서 팔아도 돈 많이 받을 걸. 하하하.” 농담 잘하는 하 교수가 호탕하게 웃었다. 박씨의 작품은 살림집 1층을 통째로 비워서 방마다 전시해놓고 있다.
  
   대형작품이 많은 하 교수에게 더없이 좋은 이 집에 자리를 잡기까지는 긴 세월이 걸렸다. 가난한 시대의 여느 부부들처럼 1967년에 결혼한 부부도 홍익대 앞 단칸 셋방에서 시작했다. 겨울이면 방 윗목에 놓아둔 그릇의 물이 얼 정도로 추운 방에서 아들·딸 두 아이를 낳았다. 몇 년 후 작업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창천동에 아파트를 구했다. 공동변소를 사용하는 연탄 아파트였다. 복도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집이 죽 붙어있었다. 아침이면 복도에 연탄가스가 자욱했다. 밥 먹듯이 연탄가스를 마셨다. ‘아이들 죽겠다’ 싶어 화곡동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했다. 그 집에서 30년을 살았다.
  
   갈수록 하 교수의 작품이 늘어나는데 보관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변변한 작업실도 없이 임대를 전전했다. 자신의 아틀리에를 갖는 것이 꿈이었던 하 교수를 위해 박씨가 나섰다. 하 교수의 정년퇴임을 앞두고 일산 호수공원 바로 옆에 작업실 겸 집을 마련했다. 현재의 집으로 옮기기 전의 일이다. ‘카센터’로 사용하던 집을 화가의 아틀리에로 바꾸기 위해 박씨는 손목의 인대가 늘어나고 발에 깁스를 해야 할 정도로 몸살을 겪었다. 그렇게 퇴임 후 일산에서 제2인생을 출발했다.
  
   65세가 되어서야 제대로 된 작업실을 갖게 된 하 교수는 이사한 첫날 너무 좋아서 술을 마시고 엉엉 울었단다. 이렇게 힘들게 마련한 집에서는 오래 살지 못했다. 손학규 경기도지사가 취임해 호수공원 일대를 한류우드로 조성한다는 계획을 발표하면서 집이 사업부지에 수용된 것이다. 집을 지키기 위해 후배 미술인들이 나섰다. 대책위가 구성되고 서명운동을 하는 등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나중에 시에 기증을 하더라도 집을 지키고 싶어 끝까지 버텼다. 문제는 ‘비’였다. 부지조성을 위해 터를 닦느라 하수도고 뭐고 없어지는 바람에 비가 오자 집으로 물이 차 들어왔다. 위태롭게 버티고 있던 작품이 쓰러지면서, 울며 물을 퍼내던 박씨의 머리를 쳤다. 박씨는 “그때 귀를 다쳐 아직도 이명이 있다”고 말했다. 이번에도 박씨가 나섰다. 일산을 샅샅이 뒤져 이 집을 발견했다. “물류창고로 쓰던 곳인데 보니 안성맞춤이었어요. 작가 하종현에게 필요한 공간은 내가 가장 잘 알잖아요. 작품 사진 찍으려면 전깃줄 없는 넓은 마당이 있어야 하고, 그림 운반차도 드나들 수 있어야 하고, 대형작품 보관할 공간도 있어야 하고…. 그런 것들 다 따져보니 딱이더라고요.”
  
   전시실을 꾸미는 것이며 작품전시실을 만드는 것도 늘 그랬던 것처럼 박씨의 일이었다. “수백 점의 작품을 보관하려면 통풍이 잘 돼야 하는데 해인사의 팔만대장경 보관한 곳이 떠올랐어요. 거기서 아이디어를 얻어 청계천에 가서 직접 꺾쇠를 사다가 작품 하나하나 간격을 두고 세워둘 수 있게 만들었죠. 가나아트의 이호재 대표가 와서 보고는 감탄을 하더라고요. 직원들 보내 교육시켜야 되겠다면서.”
  
    
   “내 용돈 올려줘!”
  

▲ 하종현 교수의 경기도 일산 자택 내에 있는 전시실. 박씨의 내조에 대해서는 두 말 없이 인정하는 하 교수는 박씨에게 한 가지 불만이 있단다.
  
   “내 월급을 안 올려줘! 인플레에 물가가 얼마나 올랐는데 10년째 그대로야.” 일흔 넘은 노교수가 용돈 타령을 했다. “이 사람이 얼마나 짠순인지 몰라. 절약이 아주 몸에 뱄어.” “한 푼도 허투루 안 써.” 흉보는 줄 알았는데 듣다보니 부인 자랑이다. 사실 교수 월급을 쪼개 이만한 살림을 일구기는 쉽지 않다. 더구나 하 교수의 말대로 ‘그림 안 팔리는 작가’의 살림이다. 월급 쪼개 돈 좀 모아놓을라 치면 해외 전시다 뭐다 해서 다 털어갈 땐 속상하기도 했단다. “꼬불치는 돈 없이 월급 고스란히 갖다줬다”는 걸로 할 일을 다했다고 말하는 하 교수이니, 줄줄 새는 가계부는 절약으로 메우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박씨는 아이들 유치원도 안 보내고 집에서 직접 가르쳤다. 두 아이만 가르치는 것도 부족해 동네 아이들까지 모아 집에서 미술유치원 흉내를 냈다. 무료로 시작했더니 동네 아이들이 너무 몰려들었다. 수고비만 받고 선착순으로 아이들을 받아 몇 년을 계속했다. 대기자가 줄을 설 정도였다. 하 교수의 작업에 방해가 되는 것 같아 연년생인 두 아이가 중학교 가기 전에 그만뒀다.
  
   푼돈에도 벌벌 떨던 박씨가 퇴직금을 어떻게 내놓았을까? 박씨는 “이 양반이 ‘이 돈은 당신 것이니 도망가지만 말고 마음대로 쓰라’고 몽땅 줬는데 어떻게 써야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자식들한테 줘봤자 공돈이고, 둘이서 좋은 뜻에 쓰자고 마음을 모은 거죠.”
  
   작가만 지원하던 하종현미술상은 3년 전부터는 평론가에게도 500만원씩 주고 있다. 활동무대가 좁아지면서 힘들어진 평론가에게 힘을 보태고 싶어서다. 박씨는 한 술 더 떴다. “지금은 유망한 작가들을 대상으로 하는데 가난한 작가들을 위한 상도 만들고 싶어요. 평생 그렸는데 빛 못 보는 작가들도 많잖아요. 저 양반 작품이 좀 팔려서 상도 여러 부문으로 늘렸으면 좋겠어요.”
  
   부부는 “밥 먹고 살면 됐지. 죽을 때 싸갈 것도 아닌데. 우린 밥 먹고 물감 살 돈만 있으면 된다”고 입을 맞춘 듯 말했다.
  
   돈 욕심은 없지만 후배 미술인 돕고 작품 활동 오래 하고 싶은 부부의 화두는 이제 ‘건강’이다. “제발 술 좀 줄였으면 좋겠어요. 건강을 생각해야죠.” 무던한 박씨가 결혼해서 지금까지 하 교수에게 하는 유일한 잔소리다. 하 교수는 소문난 주당이다. 1년 360일 술자리가 이어진다. 후배 교수들도 못 따라오는 주량이란다. “다시 태어나도 하 교수와 결혼하고 싶다”는 박씨는 “만약 그렇게 된다면 술 안 먹는다는 각서를 꼭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씨는 하 교수의 건강주치의 역할도 한다. 남편에게 ‘돌팔이 의사’라는 놀림을 받으면서도 매일 아침 쑥뜸 떠 주고 인터넷 뒤져 갖가지 건강차를 만들어낸다. 아들이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의사이지만 하 교수의 건강비법은 박씨의 정성인 듯했다.
  
   “건강하니까 술도 마시지.” “그림 팔리는 작가가 있으면 역사를 만드는 작가도 있어야지. 작품 한 점도 안 팔려도 좋아.” 이렇게 하 교수가 큰소리 칠 수 있는 것이 알고 보면 부인의 공이었다. 나이 들면 추억의 힘으로 산다는데 하 교수와 박씨는 앞으로 할 일만 생각하기도 바빠 보였다.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다음 요즘    구글 버즈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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