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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종현, 불안과 침묵: 필립다장-미술평론가     2007/07/28
하종현, 불안과 침묵: 필립다장-미술평론가


하종현의 작품을 단지 추상 미술 (1945년 이래 미국과 유럽 및 한국 등에서 국제적으로 번진)의 역사 속에서 간과해 버리는 경솔함이 있는데, 그의 작품들은 엄격히 말해서 모노크롬의 실천으로 볼 수는 없다. 작품들은 단색으로 뒤덮힌 간단한 화포가 아니라 물감의 다양한 두께에 따라 형형색색의 여러가지 색조를 자아내는 묘미가 있는데, 마대천의 구멍난 올들을 잘 활용하기 때문이다.
그의 회화적 몸짓과 기호들은 마치 마포에 베어든 물감 덩어리 그 자체가 응결되어 있는 듯하나 추상표현주의의 냄새는 풍기지 않는다.


그의 작품은 이론적으로 많은 선례를 갖고 있지만, 기존 화풍의 어떤 범주에도 속하지 않고 양식화된 단순 형식에 귀착하지도 않는 독창성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로 하여금 매우 주의 깊은 시선을 요구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사조적 분류에서 벗어났듯이 국제 미술 운동의 연대기적 계보에서도 벗어나 있다. 단지, 너무 쉽게 그리고 너무 도시적인 이유로 미니멀리즘의 변형물로만 인식할수 있겠지만, 그는 마크토비(Mark Tobey)의 후계자는 물론 로버트 라이만(Robert Ryman)이나 브라이스 마든 (Brice Marden), 그밖의 어떤 1930년대 작가의 한국적 변신도 아니다. 굳이 비교할 필요가 있다면, 아마 장 드고텍스(jean Degottex)가, 가장 간소하고 간결한 말기의 작품들을 고려할때 그의 바로 앞에 놓일 것이다.


그의 독창성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캔버스 작업과는 매우 다른 초기 작품들을 살펴 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1972년에 제작된 그의 작품들 가운데 나무 상자를 이용해서 만든 오브제 작품이 있는데 마치 관 같은 모습이다. 내부에는 동아줄이 다소 팽팽하게 혹은 불규칙한 나선형으로 놓였으며, 두개의 구멍을 통해 상자 밖으로 빠져 나온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타블로(평면작업)와 닮은 구조물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마포로 짠 캔퍼스에 가시 철사들이 줄지어 박히고, 그 천을 찌르며 파고든 점들이 위협적인 기호들을 만들어 낸다. 또한 이 가시철사들은 틀의 역할을 하기도 하고 사각형 마포를 바둑판 처럼 나누면서 수직, 수평의 흔적을 남기기도 하는데, 이는 전통적인 도구 사용법에서 벗어난 새로운 재료의 묘법으로서 가장 정화된 기하학의 변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가시철사나 뾰족한 점들, 창살 치기, 못의 사용이 얻어낸 묘법이 대수롭지만은 않은데, 그것은 은유적이고 상징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철사는 마치 육체를 가두고 상처를 내듯이 캔버스를 조이고 뚫는다. 철사가 한쪽 끝에서 다른 끝으로 펼쳐지면서 도처에 억압의 기운이 깔리고, 작가와 그의 동시대 사람들은 물론, 그 누구에게도 자유는 더이상 존재할 수 없는 것이 되며, 수용소, 감옥,노선, 군법,선언,전시 상황과 같은 정치적인 성격을 지니게 된다. 그의 작품은 무언가를 묘사하거나 제시 하지도 않았고 설명적이지도 않다. 가령 작품이 무엇인가를 선언하고 있다면 그것은 소리없이 조용히 이루어지고 있을 뿐이다. 작가에게는 인위성이나 연극성 없이 그가 처한 그시대와 그 장소에 있는 바를 제시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시기를 지나면서, 그의 작품은 느슨하거나 혹은 팽창된 용수철을 마치 철골처럼 병치시켜 백색 화면을 덮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이미지도, 깊이도, 볼 것은 아무것도 없고, 색채 또한 그리 중요시 되지 않은 채, 단지 가시 철사보다는 덜 불안한 철선들로 구성된 직사각형만 있을 따름이다.
이 철선들은 공간을 침략하고 몹시 집요해 진다. 이러한 금욕적인 그들의 조직망을 증식시키고 늘이고 발전 시킬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서 이는 장황하기 보다는 오히려 대수롭지 않은 방법으로 표현된 고통과 은유로 암시된 비극의 상징이다. 이와 같은 의문의 알레고리를 위해서는 1973년대 소묘 작품들 이상의 제목이 필요 없다. 그는 이 시기에 기하학에서 회화적 표현의 자원을 모색했는데, 이는 기하학 자체에 관심이 있었다기 보다는 그것이 갖고 있는 한정성 및 폐쇄성의 세계를 암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역사가들은 그의 작품을 유럽과 미국에서 볼수 있는 많은 사례들 처럼 사회의 억압과 정치적 반발의 표현등과 비교하고 어떤 다른 예가 있는지를 밝혀 줌으로써 가치를 찾아보는 것이 올바를 것이다.


각설하고, 우리의 의도는 이러한 항쟁 작품과 위협적 작품들의 색다른 특성을 지적한 후 최근의 작품들로 되돌아 오는 것인데, 실상 그것들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 캔버스는 더 이상 가시철사에 상처 받지는 않지만, 여전히 마포는 남아서 유화 물감으로 칠해지도 메꿔진다. 색채가 다시 중요시 되고 회화적 쾌감도 가끔 나타난다. 냉담하고, 무엇인가 항의 하던 시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포화에 대한 집착, 침묵과 말에 대한 결투가 깔려있다. 포화에 대한 그의 집착은 대부분의 작품에 적용된 바, 단색 물감으로 캔버스 표면 전체를 덮는데 독창적이다. 캔버스의 하단 가장자리 부분은 천 바닥을 그대로 남겨 두는데 보통은 황토색, 암녹색,회색 또는 흰색이 펼쳐진다. 마포의 뒤에서 물감을 밀어내는 화포에 온통 스며들게 하고 캔버스의 올 사이로 유화 기름이 가득 배게 만든다. 화포의 올 틈새로 안료가 밀려나가도록 두껍게 찍어 바르면 화면 밖으로 오톨도톨한 표면층이 형성된다. 이처럼 진척된 그의 기법은 두터운 벽을 만들기 위해 대나무망을 치고 진흙을 발랐던 옛날 방식과 비교될 수 있다. 사실, 시야를 가리고, 가로막고, 멈추게 하고, 잡아두는것이 목적이다. 그 어떤것도 빠져 나가지 않고, 구멍도 없고, 원급법에 의한 에스키스도 없고, 우리의 시선은 모든 점에서 단일하고, 수직적이고, 밀집되고, 견고하고, 빽빽하고, 불투명한 차원에서 부딪친다. 이차원성은 어떠한 예외도 없이, 대기의 상태를 암시하는 최소한의 풍경화법적인 우회적 표현도 없이 규칙적이다. 의심의 여지없이 여기에서부터 억압의 감정이 존재하게 된다. 화가는 - 그리고 이것이 바로 미덕인데 - 쉽게 얻어 지는 우아함이나 우아함에서 오는 매력도 자아내지 않는다. 캔버스들은 우리가 금욕 주의라고 명명할 수 있을 엄격한 개별적 존재로 충실히 남아있고, 모든 휴식의 공간이나 예쁜 공간을 거부한다. 다시 말해서 이 타블로(작품)들은 색으로 이루어진 벽이고, 우리는 그곳을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화가의 몸짓이 남긴 캠버스 표면의 흔적들에 대해서 반박할수 있을 것이다. 견고한 마티에르에 새겨진 화가의 나이프 손질 자국이나 손가락이 지나간 흔적들은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림의 재료가 아무리 통일되어 있다 하더라고 매끈하고 균일한 표면처럼 나타나지는 않는다. 선들이 표면을 지나가고 칸들이 교차하며, 두터운 마티에르와 아주 투명한 부분의 교차는 리듬을 창조해 낸다. 불규칙한 우연성, 이렇게 형성된 색채는 빛을 포착하고 이 흔적 들은 때때로 마티에르 안에 깊게 패인 서예를 닮기도 하는 바, 여기서 그는 그 나름대로 추상표현주의의 필수적 실행 가운데 하나를 취하고 있다. 그리 확실치는 않지만, 1990년대 초 부터 제작도니 그의 최근 착품들 <접합>을 살펴 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서예는 서체와 가독성, 어떤 코드와 약정을 지켜야 하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바, 여기서는 잘못된 서예가 아니라 반-서체라는 점에서 분명히 역설적이다. 거기에는 해독할 것도 읽은것도 없다. 흔적들은 다시 덮히고, 선들은 겹치고 부서진다. 리듬은 그 자체로 단절되고 부인된다. 일화적 요소는 전혀 없고 자전적이거나 물리적 이야기 조차 없다. 그에게 있어서 서정주의나 웅변술의 탐색보다 더 거리가 먼 것은 아예 없다. 잭슨 폴록이나 조르주 마티유와는 달리 스팩타클한 안무, 드리핑, 분무, 붓으로 물감 흘리기 등 흥분이나 최면 상태 또는 춤을 나타내는 모든것들을 금기시 하였다. 그의 제스츄어는 보다 짧고, 질서 졍연하고 집요하며, 쓰고자 하는 욕구를 자아낸다. 그는 단색 바탕의 화포에 - 마치 거대한 사인 처럼 - 흥분된 그의 형상을 집어넣지 않는다.


각 캔버스에 단일한 색만 사용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유혹에 귤복하는 일을 막아 줄 것이다. <접합 93-024>는 이점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있는 작품으로 기둥도 선도 아닌 백색이 비스듬히, 그리고 수직. 수평으로 줄이 새겨지는데, 때로는 나란히 놓이고 때로는 복잡하게 얽힌다. 힘이 강한 자국은 다른것을 지워버리거나 두 토막으로 나누기도 한다. 글쓰기에 반대되는 모든것, 서체의 무너짐, 점진적인 파괴, 사이 톰블리는 가끔 이러한 과정을 탐구했고 마티에르를 으깨거나 없애고 지우는 것을 통해 설명이 가능한 모든 기호들을 부정해 갔다. 폐쇄된 난해한 캔버스들은 표현과 공허, 말과 침묵의 경계선 사이에 놓인 것 같이 보인다. 기호들은 - 기호가 될지도 모르는 것들은 - 사라지고 있다. 마티에르가 기호들을 흡수하고, 두터운 흰색돠 황토색 안에서 읽을수도 이해할수도 없이 사라져 간다. 마치 초기의 작품들에서 처럼 제스츄어는 모호해 지고 선들은 꼬리도 늘어진다.


포화상태.폐쇄, 침묵, 억압, 금욕, 마비, 이러한 단어들은 저항할수 없는 것이 도었다. 균질의 화면과 지배적인 단일색의 외면적인 고요함, 그 밑에는 긴장이 나타난다. 모노크롬이나 질료주의의 외관, 그 뒤에는 또 다른 것이 은은하고도 계속적으로 존재 한다. 이렇게 그의 캔버스는 역설적인 방법을 통해서 초조함을 부동성에, 강렬함을 자제력에 통합시키고, 난폭함과 금욕주의를 하나로 엮어 놓기에 이른다. (1997년)
 Ha Chong-Hyun, Concern and Slience-Philippe Dagen-Art Critic
 Ha Chong-Hyun's Conjunction, His Artistic Resources & Developmen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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