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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종현: 벽 위의 흔적들 -로버트 모건: 미술평론가     2013/06/25
하종현: 벽 위의 흔적들
                                             로버트 모건: 미술평론가

하종현은 시각적이고 영적인 현실을 완벽한 전체론적 환영으로 융합해내는 데에 탁월한 재능을 가진 화가이다.
심미적인 이해력에 바탕을 둔 직관으로, 그는 대중적인 유행에 맞서 독특한 개성적인 시각을 지지하는 조용한 저항을 일으킨다.
미술에서의 이데올로기 이슈나 다른 것을 차용하는 반복적인 스타일들에 의존하지 않고 그는 표면, 제스처, 공간과 빛의 미묘한 조화의 문제를 포함하여 회화의 좀 더 근본적인 문제들에 초점을 맞춘다.
하종현은 오랜 시간 동안 그 의미가 지속되는 여느 예술이 그렇듯이, 예술가는 회화에 실체를 부여한 숨겨진 감정적 흔적들을 발견하기 위해서 작품에 대해 숙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는 행위 속에서 예술가가 발견하는 것은 관람객에게도 영향을 준다.
이러한 회화는 문화간의 차이를 뛰어 넘는 현실의 리얼리티를 구현한다.
여타의 다른 견해를 가진 비평가들은 상업 미디어의 로고나 사인이 탈문맥화되어, 관람객을 정보의 과부하가 주는 황홀함과 무아지경으로 현혹하는, 또 다른 포스트모던적 예술 시도들을 옹호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종현의 회화 작업들은 이들과는 전혀 다른 방향을 지향한다. 그의 작품은 전체론적 자각의 과정을 통화여 생겨나는 물질적 아이디어로서 예술을 구현한다.
욕망을 탈바꿈하여 사색으로 고양시키는 하종현의 능력은 곧바로 이를 부각시킴으로써 그가 선보이는 추상적인 표상을 드러낸다.
그의 회화는 우리를 영상에 대한 사색으로부터 유리시키는 모호성을 정화한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간극을 포착하고 좁혀가는 화가이다. 한편, 그의 일상생활의 세속적 현실에서 제거되어 버린 어떤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느끼도록 관람객을 유도하는 화가이다.


하종현은 감정과 물질을 화해시키는 것 뿐만 아니라, 인간의 문화를 끊임없이 왜곡하는 시뮬라크라의 공세 속에서도 현실 감각을 유지하는 문제를 통해 회화에 접근한다.
예술이란 단지 한사람이 소비 사회에서 얼마나 많은 정보를 수집했으며 모호성의 파편들로 종합했는지에 대한 것만은 아니다.
깊은 의미를 갖는 예술은 언제나처럼 자연의 윤리적 차원, 다시 말해 그 사람의 내면 의식과 일상 세계의 대화 속에서 지속된다.
따라서, 진정한 예술가는 기만에 의해서가 아니라 겸손함을 통해서, 그리고 초점을 집중시킴으로써 세상과 교감하고자 한다.
하종현의 조용한 저항에 관련하여 다음 두 가지 부분에 대한 좀더 섬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첫째, 그의 회화는 비교적 고요하지만 침울하지는 않다는 점이다. 그의 환원적이고 참여적인 표면에서는 활기가 느껴진다. 그의 작품은 원기왕성한 해방과 자유분방함으로 가득한 활기찬 기호이다.
하지만 시각적 언어가 계속 휴면 중이라는 점에서 보면 그들은 고요하다.
회화는 디지털 광학에서 나타나는 운동감 있는 패턴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이 언어와 관련하여 에너지와 이러한 에너지의 무한 변주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이들은 서로한테 어우러져서 우리의 일상생활을 뒤덮고 있는 예측할 수 있는 기호들의 범주를 넘어선다.
둘째, 하종현은 정적을 통하여 침묵을 기반으로 유지되지만 표현주의의 미묘한 형태로 행동을 취하는 혁명적인 입지를 고수한다.
이러한 표현주의는 치열한 감수성과 섬세한 사이에서 모호함을 보이는 충동으로부터 자라난다.
하종현은 표면을 가로질러 안료를 움직이거나 물감을 아래로 끌어당겨 바닥 모서리의 좁은 간격을 칠하는 등 대담한 표현을 구사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화가로서의 그의 저항이 손상 없이 유지된다.
그의 물감 표현이나 제스처 표출에는 우유부단하거나 비밀스러운 점이 없다. 모든 것은 시간과 공간속에서 각자의 궤도를 유지한다.
예술을 통하여 활동하는 반역자는 행동을 취하기 위해 자신의 유혹을 숨기는 사람이다.
따라서, 화가의 예측 불가능한 행동은 현상을 뛰어넘는 영적 경험으로 관람객을 이끌고, 진정한 충족감가 만족감을 제공하기보다는 흥밋거리만을 제공하는 모략을 넘어서 관람객의 지각을 고양시키는 수단이 된다.


회화에 침묵을 표현하고자 하는 바람을 달성하기 위해, 하종현은 뒷면에서부터 앞면으로 들어오는 기술적인 프로세스에 의존한다.
1970년대 말, 올이 굵은 삼베 표면으로 수년 간 실험을 한 후, 그는 캔버스의 뒤쪽에서 앞쪽으로 안료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이 특별한 기술로 인해 촉각적인 표면은 거친 느낌을 유지함과 동시에, 그가 앞쪽에서 자유롭게 안료를 처리해서 표면에 덧칠한 두꺼운 페인트 층을 지지할 수 있었다.
한국의 미술 비평가인 오광수가 통찰력 있게 밝한 바 있듯이, 하종현의 회화에 색감이 부재하는 것은 그의 흙 안료들이 색상이나, 부재하는 것은 그의 흙 안료들이 색상이나, 명암, 혹은 색조로서보다 물질로서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특히 주황색, 보라색, 초록색뿐 아니라 원색인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을 사용하여 한층 더 복잡한 하종현의 1960년대 ‘하드 예지’ 작업을 고려할 때 매우 중요하다.
직접적인 비율과 대조를 통하여, 이러한 상징적 회화들은 밀교의 기호나 만다라 혹은 전통적인 한국의 탈 또한 자연물인 콩의 꼬투리 등과 연관성을 가질 수 있다.
여하튼, 이후 작업인 <접합>-정치적 영감을 받은 1970년대 초반 개념적 작업들의 뒤를 잊는 - 에서는 안료의 사용이 검정과 흰색, 그리고 흙빛으로 줄어들고 종종 모노크롬 방식이 눈에 띄는데, 이것은 결국에는 한글 - 15세기 조선 왕조 시대 세종대왕이 발명한 표음문자 -에서 발견되는 유기적 기하학에 기초를 둔 일종의 검은색 글씨 쓰기에 영감을 준다.


과연 20년이 넘은 시간 동안 하종현이 몰두해 온 이 <접합> 시리즈는 어떤 작업인가? 그가 이 작업을 시작한 이래, 작업에는 다양한 형태와 변화가 있었다.
작가가 일종의 고대의 신비한 글쓰기, 즉 감정적이고 한편으로는 지적이며 또한 분석적인 일군의 부호의 표기들에 몰두할 때, 기 혹은 에너지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그의 <접합> 회화들은 실제로 회화가 만들어지는 순간의 일시성을 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간 속에 깊숙이 각인된다.
화면에서 환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감정의 흔적이 현재의 순간 속에 전해진다. 마음/몸의 메커니즘을 통해 환기되는 것은 해방으로 통하는 입구의 경계선이다.
삼베를 통해 안료를 밀어 넣은 모래 같은 질감의 표면은 그 시작점이 된다.
이것은 동작이 내재적으로 일어나게 될 무대이다.
붓 - 글쓰기와 회화의 도구 - 의 연출은 공간 속에 추상적인 노트의 시퀸스를 기입한다. 이러한 추상적인 노트로부터 사람들은 그것을 둘러싼 공간에 의해 정의되는 언어 존재 이전의 구조를 가진 신석기인의 감각을 경험한다.
그의 회화에 드러나는 행위는, 대부분의 20세기 표현주의적 서구 회화의 양식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자아를 주장하는 것이 라기 보다는 여백을 찾는 것과 관계한다.
우리는 하종현을 글자 작업의 핵심이 추상표현주의나 이 흐름을 추종한 후발주자들이라고 할 수 있을 브라이스 마든, 데이빗 리드, 혹은 테리 윈터스의 작업에서 발견되는 것과는 정반대라고 주장할 수 있다.
화가로서 이들이 유일하게 집중했던 것이 자아라고 말한다면, 이들의 작업을 왜곡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하종현의 작업과 비교해 볼 때 이들의 작업에서 자의식적인 면모가 더 많이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이것은 일부분 문화나 훈련을 차이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례로, 미국의 미술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본인의 작업 의도를 말로 설명하는 능력을 상당히 강조한다.) 비록 1970년대의 정치적인 작업에서는 그의 서체 훈련이 거의 나타나지 않았지만, 강철 스프링과 갈고리형 와이어 작업들은 거친 삼베 표면을 가로 질러 뻗어 나갔다. 십 년 후, 그의 아름다운 글씨 쓰기가 회복되었고, 그로부터 지금까지 이것은 주된 근원적 원칙으로 자리를 잡았다.


서구 모더니즘의 자의식적 원칙과는 반대로 - 여기에는 몇 몇 눈에 띄는 예외가 있는데, 이는 주로 앙리 미쇼나, 반 벨데, 탈 코트, 루치오 폰타나 등 유럽인들의 작품에서 발견된다. - 하종현의 최근 회화 작업들은 현존보다는 부재에 관한 것이다.
각각의 경우 하종현의 의도는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을 향하고 있다.
그것은 자신을 내세우는 주장이 아닌 겸손함을 지향한다. 뿐만 아니라 그의 최근 작업에서 그리기와 쓰기는 거의 구분되지 않는데 이것은 서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경향이다.
종종 하종현은 그 위에서 일어난 쓰기/그리기의 흔적들을 드러내기 위해 그의 그림의 베이스 라인 근처에 가공되지 않은 마를 사용하기도 했다. <접합> 시리즈의 흰색 회호 작업 중 일부는 (종종 미니멀리스트라고 잘못 호칭되는) 미국 화가인 로버트 라이만이 작업과 닮은 점이 있다.
하지만 하종현과 라이만의 의도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이 두 화가간의 유사성은 표면적인 것이다. 두 화가가 모두 흰색 안료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종현의 회화에서 이 점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흥미롭게도 라이만은 여러 차례에 걸쳐 그의 작업 포인트는 흰색에 있지 않고 다만 흰색안료가 그의 작업의 실용적이고 물질적인 측면과 이질적인 내용에 대한 추측들을 잠재운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하종현이 1970년대 초반 정치적인 성향을 가진 “A.O", 그릅의 창립 멤버였다는 사실은 종종 언급되지만, 그가 종종 소위 한국의 ‘공간 화가들’ 이라고 일컬어지는 부류와 더 가까웠다는 사실은 - 아마도 이데올로기와 성격상의 차이 때문에 - 잘 언급 되지 않는다.
하종현, 박서보, 윤형근, 이우환, 김창열이 이 그릅에 속한 다섯 명의 주요 멤버들이다.
비록 이들은 의도나 스타일에서는 관련성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노크롬, 환원주의, 캘리 그라피의 사용과 표면 공간에 대한 관심을 통해 그들의 작업간에 지속적인 연결 고리가 있음을 탐지할 수 있다.
예술가들이 생각하기에는 미술사학자들이 부정확한 주장을 하는 것처럼, 예술가들 또한 종종 서로 분리되어서 완전하게 독립적으로 이해되기 위해서 그들의 주장을 왜곡하거나 과장한다.
이러한 주장들은 흥미롭고 종종 - 이우환의 일본 모노하 미학과 이탈리아의 아르테 포베라 운동 사이의 중요한 연관성과 같이 - 타당성도 있지만, (2000년 광주 시립미술관에서처럼) 이 화가들의 작품을 서로 연관선상에서 바라볼 때, 그들 사이에 놓은 상호 작용하는 공간적 인접성이 어떤 논리적이거나 언어적인 설명을 좌절 시키는 순간이 있다.
이러한 문맥 속에서, 하종현은 표면에 대한 그의 애착이 단순한 스타일이 아니라 그의 내면의식과 풀리지 않게 연결되어 있는 회화의 한 방식이라고 분명하게 이야기 한다.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반복되고 있는 주제들이 있는데, <접합>회화 시리즈의 다양한 행보 속에서 작용을 하는 이들의 영향을 무시하는 것은 어렵다.
그것이 바닥 모서리 윗부분까지 내려온 수직 커튼을 포함하든지 아니면 빠르게 새겨진 블록 스타일의 캘리그라피를 포함하든지, 거기에는 즉각적으로, 명확하게 나타나는 지울 수 없는 일관성이 있다. 하종현의 회화 작업에서 나타나는 일관성은 1950년대 초 ‘액션 페인팅’에서의 제스처의 축적은 회화가 완결된 느낌을 유지하기 위해 시각적 ‘긴장’을 필요로 한다고 쓴 미국이 추상표현주의 비평가 해롤드 로젠버그의 주장을 연상 시킨다.
로젠버그는 대체적으로 프랑스 현상학 - 특히 모리스 메를로 퐁티의 이론 - 에 근간하여 이야기한 것이었지만, 그의 논점은 그의 비평적이고 형식적인 관찰들을 예술가의 자아 문제로부터 분리시키는 합리적인 객관성을 갖고 있다.
나는 추상표현주의에 관해서는 시각적 긴장이라는 로젠버그의 아이디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이 하종현의 회화와 관련해서는 어떻게 기능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가 없다.


나는 시각적 긴장에 대한 로젠버그의 생각이 한국이나 중국의 추상 화가들을 설명하는 데에도 통용될 수 있는 일종의 형식주의의 만병통치약이라기 보다는, 1950년대 뉴욕파와 관련하여 문화적 특수성을 가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프란츠 클라인의 1950년대 흑백 제스처 회화 작업에서 로젠버그가 이해했던 바로 그 시각적 긴장감을 하종현의 <접합>에서 찾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이것은 하종현의 회화에 시각적 긴장감이 배제되어 있다는 뜻은 아니다.
만약 그것이 존재 한다면, 이미지 속에서 발견되는 블록 캘리그라피나 표면 질감과는 다르다.
또 다른 요소는 삼베의 짜인 올을 통해 페인트를 누출시킨 것으로, 이는 하종현의 표면 작업에 독특한 매력을 준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종현의 캘리그라피가 클라인의 좀 더 세심하고 조심성 있는 붓질과는 완전히 다르게, 조절과 억제로 인해 각기 다른 속도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클라인이 추상화로 전향하기 전 미술 훈련을 받은 사실주의 풍경 화가이자 초상 화가였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클라인은 하종현과는 다른 꼼꼼한 캘리그라피를 선보였지만, 클라인의 <니진스키의 초상>(1949)은 그가 사실주의로부터 벗어나 추상표현주의의 주요 인물 중 하나로 되어가는 과정에서 나타난 논리적인 전이를 시사하고 있다.
2008년 1월, 경기도에 있는 화가의 작업실을 방문했을 때, 나는 하종현의 에너지에 매료되었다. 그 에너지는 그가 시간과 공간을 통과하여 계속적으로 움직일 때, 그리고 그의 <접합> 시리즈가 계속해서 새로운 경험의 통로를 열어 놓을 때, 함께 소생했다.
그의 회화의 에너지 - 그의 회화에 내재한 - 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순간, 그는 그것과 함께 하고 있었다. 그의 <접합> 시리즈는 국제적인 추상회화의 역사에 크게 기여한다.
나는 내가 본질적으로 그의 입장에 동의하고 있다는 것 외에는 하종현에 대해 이야기할 특별한 반론이나 담론이 없다.
회화와 조각이 이슈라기보다는 개념적인 설치물로 간주되고 있는 시대에, 나는 하종현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과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감탄할 따름이다.
미국의 물질주의 개념과 상반되는 인생의 질에 관심을 갖는 것은 화가에게 필수 조건이다.
나는 이러한 가치가 그의 작업 속에 상당 부분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회화는 깨달음과 계몽을 지향한다.
이것은 한 개인의 발상이지만, 여기에는 돈이 미술에게 주어진 유일한 등가물인 것처럼 여겨지는 보이지 않는 시장 원칙에 미술이 커다란 지배를 받게 되어 버린 지구촌의 모습이 시사되어 있다.
나는 이러한 마케팅 방식에 강하게 반대한다. 하종현은 미술이 투자의 대상이기보다는 사색의 대상임을 증명하는 예술가이다.
지난 10년간의 마케팅 전략이 시들해 지면, 오직 진정한 예술가만이 살아남게 될 것이다.
하종현의 회화는 가상 세계에 대한 촉각적인 응답을 제공한다.
그의 회화는 우리에게 모든 것이 정보, 사색, 그리고 투자에 대한 것이 있음을 이야기 한다.
하종현에게서 나는 뚜렷한 대안, 즉 예술과 인생의 올바른 관계를 발견한다. 나는 벽 위에 구연된 흔적들을 본다.
그것은 자랑스러운 역사와 문화의 흔적이며, 그의 예술이 다가오는 새로운 시대에도 지속될 것임을 말해주는 미학적인 증가이다. 그의 작품은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관람객들에게 용기와 만족, 영감 그리고 미래에 대한 강한 희망을 안겨준다.


 Ha, Chong Hyun: The traces on the wall - Robert C. Morgan -Art Critic
 자연의 원소적 상태로의 회귀-하종현의 근작에 대하여-윤진섭 l 미술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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