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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과 폭풍우-토시아키 미네무라 ㅣ 미술평론가     2007/08/03
초원과 폭풍우-토시아키 미네무라 ㅣ 미술평론가


이번 전시회에 출품되어지는 작품들 가운데 하종현의 완성작 네 점이 칼라로 인화되어진 사진의 상태로 보내져 왔다. 그 중 두 점은 이전부터 그려져 왔던 그의 스타일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었고, 나머지 두 점은 새로운 기법에 의한 작품 이었다. 최신작 두 점의 사진을 보는 순간, 솔직히 말해 나는 어떠한 해방감에 가까운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지금까지 일본에서 잘 알려진 대로, 하종현의 작품은 지난 10년간 기본적으로는 거의 변화되지 않은 기법에 의해 제작되었으나, 특유의 긴장감을 보는 이에게 맛보게 했다. 이 기법에 대해 좀더 자세히 설명을 덧붙인다면, 물감을 두껍게 캔버스의 뒷면으로 부터 투과시켜 그 결과 앞면에는 무지 단색의 거의 흙벽의 느낌에 가까운 색이 스며서 베어 나오게 된다. 앞면에 스민 감촉은 마치 서리가 내려진 토양이 전부터 머금고 있던 수분들에 의해서 울퉁불퉁 위로 치솟아 오른 부분을 가볍게 혹은 무겁게 두드린 것 같은 효과를 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캔버스의 질감과 물감의 압력간의 평균 수위에 일반적인 회화의 표면도 뒷면도 아닌 '제 3의 표면'을 불쑥 눌러 세우는 것이다. 이 무광택의 '제 3의 표면'은 서양화처럼 안구의 정점을 향해 표면으로 돌출되어 오는 것도, 혹은 일본인에게 익숙한 완만하게 뒤집어지는 표현의 효과도 아니다. 그것은 도망칠 길 없이 불규칙적으로 연속되어지는 객체로서, 보는 이의 시선을 90도 각도로 못박아 둔 채, 숨막히는 상태로 화면의 위를 빙글빙글 방황하게 만든다.


당신의 호흡을 멈추게 했던 것은 바로 진실이다.
물감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림들은 그려지지 않았다.


이러한 회화적 수단을 통해서 회화비판, 회화의 물질 주의에 대한 회의, 회화의 비인간화 현상과 객체화 등을 시도하는 그 배경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그것은 1970년 전후로 일본의 모노파나 프랑스의 쉬포로 쉬르파스의 사상이 어느 정도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고, 그 무엇보다도 1960년대 후반부터 세계의 예술가들을 매료시켜온 '표현의 객체화'라고 말 할수 있는 미니멀리즘에 대한 동경이 특히 하나의 형태로 그 열매를 맺은 것으로 볼 수 있을지 모른다.


물감을 캔버스의 뒷면으로 부터 스며 나오게 하는 것 그 자체의 표현이 순수한 객체로서 존재하여 그것이 밖으로 보여지길 바라는 작가의 의도가 직설적인 표현의 방법으로 보여진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이 캔버스의 뒷면으로 부터 물감을 베어들게 하는 가는 채로 거르는 듯한 기법은 최신작에도 예전대로 쓰여지고 있다. 그러나, 최신작에 있어서 스며 나온 물갈들의 울퉁불퉁한 결정체(서리기둥)들은 윗부분을 두드린 것만의 엄숙한 형태로 끝나지 않았다는 점을 눈여겨 보고 싶다. 붓을 사용했는지 나이프를 사용했는지에 대해 사진만 가지고서는 알 수 없으나, 짧고도 묵직한, 그러면서도 톡톡 튀기는 듯한 스트로크의 세심함 교차에 의해서 물감기둥(결정)들은 적절히 짓뭉개어져, 그 위에 주의 깊게 계산 되어진 혼란함 안에서 이전까지 없던 새로운 호흡을 불어 넣어 주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하종현의 작품을 볼 기회가 비교적 많았던 나로서 이러한 변화, 굳이 얘기하자면 이 전진은 무엇보다도 기분 좋은, 가슴속이 후련해지는 듯한 것으로 보여졌다. 이 변화에 의해서도 이전과 같은 작품의 질이 보전되고 있는 가에 대해서는 실제로 작품을 대면하고 난뒤 판단할 수밖에 없으나, 그러한 문제는 별개로 하고, 이 변화는 하종현의 회화안에 내재하는 필연적인 전개의 가능성을 펼쳐 보였다는 점에서 이미 하나의 해답을 얻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어졌다. 내가 한숨 섞인 해방감을 맛보았다고 앞에서 말한 것은 적어도 과장된 표현은 아니었음이 틀림없다.


하종현이 열어 보인 돌차구 중에서 가장 주목한 부분은 물감이 물감으로서 존재하는 원리로 복귀되어져, 회화적 행위가 회화적 행위로서 존재하는 것에 대한 자각을 경험한 자기 발견의 새로움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자면, 회화의 구성요소의 개별적인 부분이 이념에 대한 강박 관념과 행위의 금욕주의로 부터 탈피되어져 자기 동일성의 범주 안에서 자유롭게 또 다른 모습을 찾아내려는 한편, 회화가 충분히 자기 표현을 할 기회를 손에 넣게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이러한 '회화의 자기 표현'이라는 자기 동일성을 인식한 새로은 모습의 구조의 획들을, 나는 하종현 최신작들이 갖는 커다란 성과라는 점이라고 강조해 두고 싶다, 최신작들의 스트로크는 단지 색을 가한 것도, 혹은 디자인과 같이 어떤 의도에서 구성되어진 것도 아니다. 스트로크는 이미 준비 되어져 있던 성숙동[ 달한 '색조'라는 들판으로부터 본연의 언어를 끌어내어 자기 자신과 맞세워 대화시키기 위해 행하여졌다. 마치 여름날 숨막힐 듯 땅에서부터 솟아오른 풀잎의 들판에 어디선가 세판 폭풍우가 불어닥쳐, 이윽고 잠잠했던 풀숲이 커다른 술렁거림으로 뒤덮인 것과도 같다.


그리하여 스트로크 그 자체가 깨어진 흔적 없이 색조와 물감의 두께가 자기 동일성으로부터 생명력을 얻어, 다른 어떠한 것에 대해서 매몰되지 않는 바람과도 같은 쾌청한 자기 표현을 획득하고 있다.


이렇게 처음으로 등장한 스트로크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격정이나 표현주의의 도구로 그 역할을 끝내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크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화가의 손길은 스스로 성장하여 이윽고 생명력을 품은 커다란 존재로 커져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객체의 물감과 캔버스라는 들판에 대해 -커다란 자연과 객체 - 어디까지나 겸손한 태도를 잃고 있지 않다. 여름날의 풀잎을 말라죽게 내버려둘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화가의 손길은 물감의 결정(기둥)들을 절대로 소멸 시키지 않았다. 만약 그의 손에 의해 물감 결정들의 생명력이 빼앗겨 버린다면, 자기 동일성의 세계는 영원히 되돌아오지 않게 되었을지 모른다. 그 누구보다도 이러한 결과를 하종현은 감지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흙의 서리 기둥을 밝아 서리의 결정을 선명하게 빛내고 있으면서도, 서리가 내린 들찬 그 자체는 결코 손대어 해치고 싶지 않은 가슴 따뜻함과 현명함을 하종현의 신작으로 부터 읽을 수 있었다. 이러한 모든것이 회화의 질을 구성하는 회화의 통일성을 유지한다는 점에 적지 않은 공헌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1985년)
 Prairie and Storm-Toshiaki Minemura l Art Critic
 On Ha Chong-Hyun's Painting-Nakahara Yusuke l Art Crit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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